평소에는 두 눈이 맹점을 커버한다. 두 눈으로 정확히 그 대상을 응시하면 결코 맹점을 발견할 수 없다. 한 눈으로, 그리고 곁눈질로 보아야만 흐릿하게 시야의 구석에 맹점이 보인다. 그러나 맹점으로 초점을 옮기는 순간 맹점은 지워진다.
한 눈으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맹점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부분은 의식이, 그리고 무의식이 채운다. 그러고보면 맹점은 '보이는' 지점이 아니라 오히려 빨려들어가는 구멍, 동공에 가깝다. 구멍을 볼 때 우리는 구멍을 '보는' 것이 아니라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어둠을 보고 있잖은가.
시신경 다발이 말려들어가는 그 지점, 맹점은 왜 생겨났을까?
경계가 흐릿해지는 지점, 하나를 위해 숨겨지는 다른 것, 지워지는 이름, 빈번한 말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맹점을 보는 방법
백지에 X표를 하고 오른쪽으로 5∼10cm 떨어진 곳에 작은 원을 그린 후, 그 간격의 3.5배 거리에서 왼쪽 눈을 감고 X표를 주시하면 작은 원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더 간단하게는 손가락으로 할 수도 있다. 오른 쪽 눈에서 약간 더 오른쪽에 손가락을 가르키고, 위치를 가깝게 멀게 조정하다보면 어느 순간 손가락 끝이 보이지 않는 지점이 있다.
말할 타이밍을 찾는다.
"나는 드디어..."
이려진은 이 드로잉을 하기 위해 아주 긴 시간의 자신을 담보한 게 아닐까. 스스로를 전복시켜, 보려하지 않았던 '그때'를 마주한다.
어쩌면 맹점은 영원히 말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잊어버리고, 놓치고, 보이지 않았던 우리의 '그때'를 드러내는 용기는 이렇게 말을 해야 생기는 것 같다. 어떤 기억이, 답이, 단어가 혀 끝에서 맴돌다가 툭 튀어나올 때를 기다린다. 기다림은 노력이 필요하다.
세 번째 맹점에는 임솔아 시인과 윤결 작가가 같이 모였다.
우리는 무뎌지는 이야기를 나눴다. 언제부터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사람이 되었을까. 지나치는 것들, 그냥 그런 것이라고 넘기는 것들. 점점 커지는 맹점.
그러고보니 맹점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른 걸까, 하는 의문이 든다. 가위표(x)를 들여다보다 점(.)이 사라지는데 그 점은 얼마만큼 커야 혹은 작아야 가려지는 걸까. 왜 점(.)은 사라지는데 배경은 같이 사라지지 않나. 이것 역시 심리적으로 커버하고 있는 걸까. 맹점으로 존재가 지워진 자리에 슬며시 주변의 잔상이 안개처럼 깔려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주변부와 중심의 경계에 서 있는 이야기도 했다. 어느 바운더리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적당한 이름을 찾지 못한 관계. 이름을 갖지 못해서 부정당하는 곳에 서 있는 사람들.
네 번째 맹점부터는 정석우 작가가 추가로 모이게 되었다.
오늘은 Filling-in 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난 시간 임솔아 시인이 왜 맹점으로 사라진 부분이 텅 빈 여백으로 남지 않고 주변에 있는 것들로 덮여있는지(위장되어 있는지)를 물었고, 그것에 대해 려진씨가 찾아 본 결과였다.
그러니까, 맹점으로 사라진 자리는, 그 공백을 느끼지 못하도록 주변의 잔상들이 번져 그 자리를 메꾼다는 것이다. 기억같다는 생각을 했다. 기억의 공백도 그렇게 메워지곤 하니까.
그 외에는 어떻게 작업으로 연결지어 나갈 것인지,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조금씩 초점을 맞추는 과정을 지나고 있다. 맹점은 맹점에 초점을 맞추는 순간 사라지는데, 우리는 어찌될 것인지.
다섯 번째 맹점에 박성민 작가가 참여하면서, 멤버 8명이 모두 모였다.
맹점을, 그리고 맹점일 수 있는 무엇을 함께 이야기해보자고 모인 첫날부터 마지막 모임까지 나눈 말들을 복기했다. 각자 작업에서 초점을 맞추고픈 내용, 아직 막연하나마 취하고 싶은 방식을 말했다. 지금까지는 초점을 한 곳에 맞춰 비로소 맹점을 (흘낏) 보고야 말겠다는 마음이었다면, 오늘부터는 어디에 초점을 맞출지 눈을 바깥으로 돌려야 한다.
박성민 작가가 "중요한 게 아닐 수 있지만, 계속해서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 그것이 맹점 같다고 했다.
집중하느라, 파고드느라 놓쳤던 것. 눈에 힘을 빼고 머리를 식히고 다시 시작한다.
이른 아침 8명이 모두 모여 윤결, 정석우 작가의 작업을 보았다.
"자신의 작업을 보면서 자꾸 웃은 이유가 뭔가요? 자신이 영상 안에 등장해서 부끄러운 건가요?
"네? 아니오? 그때 기억이 나서, 좋아서 웃음이 나왔어요."
-윤결 작가의 작업을 보면서 나눈 대화 중
잊힌 존재에 대한 관심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어디쯤 머문다.
* 〈정착 나온 돗자리〉, 단채널 비디오, 4분 39초, 2012, 인천동암(still cut)
정석우 작가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가능성을 캔버스에 담는다고 한다.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두 손 모아 비는 그림 속 눈동자는 미래를 보는 듯, 어느 한 점을 강렬하게 바라보지만 명료함은 없다. 작가가 표현했듯 '실마리를 잡듯' 흐르고 뒤엉킨 시선이다.
문득 흔들리는 이미지들은 볼 수 없는, 없을, 없었던 무엇을 드러낼 수도 있지만 아무것도 드러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사라지는 게 아쉬운 사람은 소멸하고 있는 그 자리에 자신을 용감하게 던진다. 화면은 앞으로 볼 수 없는 시공간을 예고하는 듯 무겁게 흔들리다가, 오늘처럼 새어 나오는 웃음이 되었다.
* 공간확장 '서식지' 프로젝트 〈능선을 보는 눈〉, 2017
지독한 더위가 시작되기 전, 7월의 어느 날 봄로야, 이려진 작가의 이야기를 들었다.
봄로야 작가가 포트폴리오를 보여주다 말고, 배시시 웃으며 《답없는 공간: 근사한 악몽》 전시를 준비하다 겪은 사고를 얘기했다. 공사 현장에서 떨어진 강철빔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는 이야기. 작업을 위해 반복해서 지켜보던 대상이었기에 사고를 피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고. 반복이 주는 이득, 눈에 보이는 장점이 있다 생각했다고 한다. 봄로야의 작업에는 반복이 반복되고 있었다.
* 〈답 없는 공간_근사한 악몽〉, 35.5×30.5cm (each), mixed media on linen, 2016
이려진 작가는 오랜 시간의 공백을 먼저 고백했다. 작업을 해야 하는 명분, 작업을 하지 말아야 하는 명분. 유독 회전하는 것에 마음을 뺏겼던 이전 작업 중에서도, 스스로 실패한 작업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이야기했다.
그는 과거의 거슬림, 실패, 망함, 놓침 속에서 단서를 찾아 새로운 작업을 해보겠다고 한다. 그는 시간 속에서 무엇을 되돌려놓을까.
* 〈무제〉, 싱글 채널 비디오, 00:01:22, 2010
이보다 더 더워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몇 주째 이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계속해서 뜨겁던 날에 임나래, 임솔아 작가의 이야기를 들었다.
둘 모두 ‘시각적인 자료’ 없이 어떻게 ‘재미있게’ 발표를 할 수 있을지 고민했었다. 이 고민에 임나래는 시각적인 것을, 임솔아는 청각적인 것을 더해 왔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둘 모두 무척 흥미로웠다.
임나래는 이미지와 글의 간극에 관심이 있다. 이전부터 해 보고 싶었던 실험으로 ‘글을 듣고 그리기’를 해 보았다. 임나래가 설명하는 누군가의 페인팅을 듣고, 나머지 6명의 참가자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예상했겠지만, 무척 다른 그림들, 한편으로는 무척 비슷한 그림들이 나왔다. 글은 작품을 온전히 대체할 수 있는 것인가. 할 수 있다면 작품을 대체할 수 있는 글이란 어떤 조건을 만족해야 하는가.
그리고, < 현재전시 >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 현재전시 >는 전시의 앞뒤에 달라붙는 텍스트를 이리저리 살피는 프로젝트이다. 이것은 전시를 대체할 수 있을까? 그 안의 글들은 작품을 대체할 수 있을까? 하지만 < 현재전시 >를 전시로 cv에 넣었던 작가는 아무도 없었다는 후문.
임솔아는 자신의 시집 <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에서 발췌한 시 몇 편과 손혜민 작가와 협업하여 참여하였던 전시 < 오니마크리스운구이쿨라리스 >에 실린 텍스트를 낭독했다. 나는 여러 번 ‘-(했)다’ 로 끝나버리는 말소리가 좋았다.
후자의 텍스트는 기존 임솔아의 글 일부들을 꼬리물기로 모아 편집해 놓은 것이었다. 그것들은 각기 다른 곳에서 왔지만 한 편의 글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임솔아는 자신이 본 것들이 머리속에 남아있다가 글로 바뀌어 나온 경험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화집에 실린 페인팅을 보고 쓴 글이라던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보았던 새하얀 갤러리라던가, 그 때 마주친 사람들, 말, 그런 것들이 어떻게 글로 번역되어 나오는지.
모임을 하는 동안 < 곁눈질로 빤히 쳐다보기 >라는 프로젝트의 제목이 생겼다. 맹점을 키워드로 각자의 작업을 살펴보며 흘긋 나눴던 이야기를 모두 포함한다. 그 마지막 시간은 강지윤과 박성민 작가의 작업으로 매듭 지었다.
강지윤 작가는 자신을 둘러싼 관계, 환경, 사건에서 체감하는 불안감을 가시화한다. 불안을 느끼는 다양한 사적 이유는 미묘하게 기울어지거나 비뚤어진 각도, 서서히 닳거나 젖어 드는 상태 등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성질의 구조물들은 무기력, 무용에 가까운 아슬아슬한 감정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그 어긋난 지점들을 낱낱이 살펴보고 뒤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준다.
*< 바르게 쌓기, 습관적인 일, 흐릿하고 선명하게도 (Stacking decent, Things entrenched, Faintly, Certainly) >, installation view / 2018 @space xx
코딩 기반 사운드와 비주얼 라이징 작업을 하는 박성민 작가는 작업에 담길 ‘서사’를 고민 중이다. 자신이 보는 세계를 컨트롤하고 싶은 욕망이 작업에 많이 드러나는데, 주로 내면에 머무르던 시선이 요즘은 사회 전반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한다. 이는 보고 있지만 판단할 수 없는 진실과 거짓 사이의 맹점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맹점 프로젝트는 < 곁눈질로 빤히 쳐다보기 >라는 제목의 그룹전으로 확장됩니다. 전시는 12월 5일부터 18일까지 신설동에 위치한 삼육빌딩에서 열립니다.
*< City Made of Code >, 2016, 'WeSA 2016' 퍼포먼스 광경
맹점을 바라보려는 우리의 시도를 전시로 이어간다. 전시에 ≪곁눈질로 빤히 쳐다보기≫라고 이름 붙였다.
곁눈질로 명명한 운동성은 나도 모르게 지우고 있는 존재를 향한 자기반성이며, 동시에 소외되거나 은폐된 지점들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드러내고자 하는 태도이다.
이 전시를 통해 일반적이지 않은 보기의 사례들을 통해 사회 구조에서 탈락되기 쉬운 사고 체제의 오류와 착시를 감각하고, 체제라고 불리는 것들에 대한 미시적 바라보기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참여작가 : 강지윤, 봄로야, 윤결, 이려진, 임나래, 임솔아, 정석우
2018년 12월 5일(수)~18일(화)
1~ 7p.m. 휴관 없음
오프닝 리셉션 12월 7일(금) 5~7p.m.
삼육빌딩 3F (동대문구 왕산로9길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