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리딩 re:reading 205 리뷰]
Mark Dion: Theatre of the Natural World;
Anthony McCall: Solid Light Works
by Laura Cumming
https://www.theguardian.com/artanddesign/2018/feb/18/mark-dion-theatre-of-the-natural-world-anthony-mccall-solid-light-works-review
설치 작가 마크 디온과 안소니 맥콜의 전시 리뷰를 함께 읽었다. 마크 디온은 올해 런던 화이트 채플 갤러리에서 회고전을 가졌다.
금화조들이 커다란 새장 안을 섬광처럼 가로지른다. 살아있는 금화조가 그의 전시에 등장하는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인데, 관객은 새장 안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 금화조를 응시한다. 금화조 역시 관객에 대해 토론하는 것처럼 지저귐을 멈추지 않는다. 이는 주 종 간의 동등한 긴장을 선보인다.
동물학 표본이나 환상적으로 빽빽이 채워진 분더카머(wunderkammer), 해부되거나 가죽이 벗겨진 채 나열된 죽은 생물들은 30여 년간 작가의 매체가 되어왔다. 마크 디온을 매료시킨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닌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있다. 우리가 어떻게 자연을 바라보고 인식하는지, 관찰하고 보여주고 보존하는지, 그 방법에 대한 것이다. 디옹은 우리가 자연에서 발견한 것들을 목록화 하고 지식을 배열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역사학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커다란 전면유리의 캐비넷에는 1999년 뱅크사이드의 템즈강 해안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회수된 아이템들을 진열되어 있다. 서랍을 열면 색, 재료, 용도, 크기 혹은 심지어 ‘경의로운 정도’에 따라 정렬된 것들을 볼 수 있다. 분류체계는 무작위적이고 끝이 없다.
실험용 원숭이와 동일한 쓰임으로 활용되는 ‘금화조’를 전시에 끌어당김으로서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 커다란 새장 안에는 금화조에 대한 인간의 탐구와 그로부터 영감을 얻어 탄생한 문학이 아름답게 진열되어 있으나, 새들의 배설물로 덮여있다. 그 위로는 금화조들의 일, 즉 ‘쏘다니며 배설하기’를 할 뿐이다. 인간과 자연은 결코 완전히 일치할 수 없다. 여전히 인간은 생물들을 우리에 가두면서 사랑한다고 하듯이 말이다. 모순 천지이다.
리뷰어는 다소 냉소적으로 리뷰를 마쳤다. 분더카머, 진열용 유리 케이스 그리고 케비넷은 현대 미술의 오래된 관습이고, 해부학 차트와 가계도 또한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리뷰어는 본 회고전의 반복성을 꼬집었다. 70년대 다른 작가들에 의해 ‘더 잘 표현되었다’는 말과 함께.
이와 대조적으로 리뷰어는 이어지는 안소니 맥콜의 전시를 극찬했다. 그는 햅워스 웨이크 필드 갤러리에서 < 솔리드 라이트 > 시리즈의 작지만 집약적인 전시를 선보였다. 리뷰는 수 세기에 걸쳐 많은 작가들이 빛으로 작업을 해왔지만 누구도 빛의 조각적 잠재력을 충분히 탐구하지 못했다고 느낀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맥콜은 칙흙같은 갤러리 안에서 추형 광선을 투영한다. 이는 마치 오래된 영화관에서 담배 연기에 의해 드러나는 영사기의 빔과 같은 감각을 선사한다.
맥콜의 작품에는 굉장한 정밀함과 통제력이 돋보인다. 초기 공연의 영상, 사진 작품들은 거칠고 심각해 보이며, (환)영적 체험과 미술 작품 그 사이 어딘가 같았다. 최근 작품들은 우아한 복잡성에 있어 좀 더 절제된 것처럼 보인다. 그의 빛은 얇은 호를 따라 점점 점으로 줄어드는 타원을 묘사하거나, 추상적인 형태, 나는 새, 바람에 흩날리는 리본을 연상시키는 것들을 그린다. 화면에서 벗어나 프로젝터를 바라보면 관객은 터널 안에 스스로 포함된 것을 포착할 수 있다. 속이 비치는 베일과 같은, 회전하는 구름 혹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날씨와 같은 감각은 화면에 집중된 빛의 순수한 그래픽적 힘과 균형을 이루고 있다.
우리가 세상을 볼 수 있게 하는 이 빛은 얼마나 허약한가, 동시에 얼마나 강한가? 이것이 바로 맥콜이 그의 작품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궁금증을 주는 부분이다. 매우 단순하고, 시적이며 이상하다.